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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김·이·박씨가 전국민의 반인 나라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드러내 놓고 말은 안 해도 미국 사는 한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져 본 생각일 것이다. 비록 아메리칸드림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빽'이나 학벌 등과 상관없이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 수 있는 곳이 그래도 이곳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태생적 조건이나 신분(?)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성씨와 본관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성씨는 5582개다. 이중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다. 무려 1069만명으로 전체 한국 인구 5107만 명의 21.5%에 이른다. 다음은 이씨로 14.7%, 박씨도 8.4%나 된다. 한국인의 거의 반에 육박하는 44.6%가 김이박씨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김이박씨가 많을까? 그들이 다른 성씨보다 월등히 자손을 많이 두었기 때문일까? 성씨의 기원이나 역사적 배경을 알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한국의 토착 성씨는 신라 왕족인 박, 석, 김씨 외에 신라 6성(六姓)이라 해서 이, 정, 최, 손, 배, 설씨 정도 뿐이었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씨도 있었지만 신라 통일과 함께 거의 소멸되었다. 이후 고려가 건국되면서 사성(賜姓)정책이라 해서 태조 왕건이 개국에 힘을 보탠 지방 호족이나 귀순 장수들에게 성을 하사했는데 지금 많은 성씨와 본관이 이때부터 시작됐다(필자의 성인 벽진이씨도 신라 말 지금의 경북 성주군 일대 벽진 태수(太守)를 지내다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이총언 장군이 시조다). 그럼에도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성을 가진 사람은 극히 적었다. 당시 인구 구성을 보면 양반 지배계층이 10%, 역관, 의관, 향리 등 중인이 10%, 그리고 일반 백성인 양인(良人)이 30%였다. 나머지 50%는 노비였다. 그러니까 15~16세기까지도 이름만 있었지 성까지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15%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분 사회가 고착화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 본관을 가진 양반이 되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2014년 출간된 고려대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이란 책은 이런 조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 교수는 17세기 후반부터 200년간 경남 산청의 김수봉이라는 노비와 그 후손들이 납속(納贖)과 족보위조를 통해 김해김씨 가문으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납속이란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나라에 돈을 내고 신분 상승을 허락받는 것을 말한다. 노비가 그렇게 돈을 내고 양인이 되는 것을 면천종량(免賤從良)이라 했다. 권 교수에 따르면 17세기 조선 전체 인구 중 약 40%가 노비였지만 200년 뒤인 19세기 중반이 되면 전 인구의 70% 이상이 양반이 됐다. 수많은 노비들이 돈으로 신분세탁을 하면서 성씨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도망간 노비들이 신분을 속이기 위해 새로 성을 만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럴 때 가장 선호했던 성씨가 바로 김이박씨였다는 것이다. 미국에 살다보니 이젠 한자로 성을 쓸 일도 별로 없고 본관을 따질 일도 거의 없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미국에 살아도 '근본도 모른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겠다. 추석 같은 명절 때 한번 쯤 내 성씨의 뿌리도 찾아보고 훌륭한 조상님들의 행적도 뒤적여 보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더라도 내 조상만 잘났네 하는 착각은 말아야겠다. 누가 조금 부족하다고 마구 무시할 일도 아니고, 내가 조금 낫다고 그리 우쭐댈 일은 더욱 아니다. 어차피 성씨의 뿌리를 따져 올라가면 나와 너, 우리네 조상님들은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을 테니 말이다.

2016-09-15

[역사의 창] 나라가 망해도 떵떵거리며 산다

신라는 천년 왕국이었다. BC57년부터 AD935년까지 992년 동안 쉰 여섯 임금이 다스렸다. 첫 왕은 박혁거세였고 마지막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갖다 바쳤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전하는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서기 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 수도 금성을 기습해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에도 견훤은 수시로 신라 땅을 침범해 왔고 신라 장군과 관리들은 잇따라 왕건에게 투항해 갔다. 더 이상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경순왕은 마의태자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기 935년 11월 결국 왕건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왕건은 항복해 온 경순왕에게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후한 녹봉까지 내렸다. 뿐만 아니라 신라 수도였던 경주 일대를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 요즘 한국에선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1912~1989)를 그린 영화가 인기다. 공주는 왕비가 옹주는 후궁이 낳은 딸을 말한다. 덕혜는 고종 임금이 만년에 얻은 늦둥이 딸이다. 영화는 나라 잃은 조선 왕족의 비극적 생애와 민초들의 힘겨운 일상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덕혜옹주의 실제 삶은 독립투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에 강제로 유학을 가야 했고 대마도주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했으며 평생 고독과 병마에 시달렸다. 덕혜옹주의 개인사는 안타깝고 불행했다. 하지만 조선 왕족들의 물질적 생활은 나라가 망한 것과 상관없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체결한 8개조 조약 중에는 조선 왕실과 전.현직 대신들을 적절히 대우한다는 내용이 중요한 항목으로 들어있다. 일제는 약속대로 작위를 수여하고 막대한 은사금까지 지급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일제의 의도대로 친일파가 되거나 식민통치의 앞잡이가 됐다. 선조의 매국으로 얻은 부와 권력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세습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라가 망해도 지배층은 아무 상관없이 그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다. 나라가 어려우면 불쌍한 것은 일반 백성들이다. 입만 열면 애국애족을 말하지만 정작 국난 때는 자기이익 자기안위 챙기기에 놀랄 정도로 민첩한 것이 지배층의 속성임을 역사는 말해 준다. 민족사 최대의 국난이었다는 임진왜란 때도 그랬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했지만 임금을 비롯한 관리들은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6.25 때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인민군이 남침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할 때도 대통령과 정부 주요 관리들은 국민들에겐 괜찮다고 하면서 자신들만 서울을 빠져나갔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공통적인 원인이 있다. 첫째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배층의 분열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멸망 과정이 다 그랬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 안팎 사정이 구한말 그때와 너무 흡사하다는 이야기가 자꾸 들려온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우리 국민들이 좀 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은 경술국치일이다.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0년 8월 29일. 27대 519년 이어온 조선이 종말을 고했다. 그로부터 만 35년. 우리 선조들이 어떤 눈물겨운 삶을 살았고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우리는 안다. 그 첫날 국치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치욕의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가시섶에 누워 불편한 잠을 자며 쓰디 쓴 쓸개를 핥으며 재기와 복수를 다짐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2016-08-28

[역사의 창] 큰 교회들의 착각

#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것은 1392년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1910년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정확히 518년간 이어졌다.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이렇게 오래 존속된 왕조는 별로 없었다. 위세등등했던 중국 왕조들도 길어야 200~300년이었다. 조선 이전 고려도 500년 왕조였다.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도 근 700년, 신라는 1000년을 이어갔다. 우리 선조들의 나라는 이렇게 장수 국가였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왕들의 뛰어난 리더십, 지배층의 솔선수범, 합리적인 제도?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어쩌다 그런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 대부분의 기간은 혼돈과 혼란의 시간이었다. 잦은 외침은 차치하고서도 지도층의 권력다툼은 그칠 새가 없었고 권력자의 부패 타락도 문제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긴 세월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래도 허리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책과 붓 대신 칼과 창을 들었던 의병장들처럼 최고 권력층이 죽을 쑤든 말든 일편단심 나라를 섬기고 백성을 다독거린 중간 지식인, 선비, 관료들이 바로 그 허리였다. # LA 한인타운에 세계선교교회가 있다. 소박한 보통 사람 200명 쯤 모이는 소담한 교회다. 이 교회가 4년째 해오는 일이 있다. 여름 방학 두 달 동안 최소한의 비용으로 150여명 아이들을 맡아 돌봐주는 일이다. 최운형 담임 목사는 말한다. "방학이면 경제적 부담에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난감해 하는 젊은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자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런 게 교회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이런 일은 교인들의 마음이 모이지 않으면 절대 못하는 일이다. 시간과 물질, 섬김의 정성까지 보태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우리 아이도 교인은 아니지만 교사로 8주간 봉사를 했다. 프로그램을 끝내면서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이 교회, 부자 교회는 아니지만 참 좋은 교회인 것 같아. 거기 비하면 우리 교회는 너무 풍족해.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LA에서 제일 크고 유명하다는 교회를 10년 가까이 다닌 아들이다. 하지만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 모양이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간 지 150년이 다 되어간다. 초창기 기독교는 개화와 문명의 상징이었다. 나라의 앞길을 밝히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이런 찬송가 가사가 한국 기독교의 시대정신이었고 한국 교회의 힘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 옛말이 되었다. 바르고 정의롭던 기풍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검소, 질박의 전통은 박제처럼 딱딱해졌고 관용, 박애의 미덕도 전설처럼 아련해졌다. 교회의 대형화, 세속화, 권력화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수천 명, 수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쏟아내는 온갖 부정적 모습들이 한국 교회의 모든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쭉정이다. 알곡은 따로 있다. 그 잘난 교회, 그 유명한 목사들이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묵묵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건강한 허리같은 교회들이 아직은 더 많다. 올 여름 아이가 봉사했던 교회도 수많은 허리 교회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현대 기독교는 수명을 다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튼튼한 허리가 떠받치고 있는 한 그렇게 쉽게 기울지는 않을 것이다. 가진 자, 잘난 자, 권력자들이 그렇게 분탕질을 했어도 500년 이상 꿋꿋이 이어졌던 조선이 그랬듯이.

2016-08-11

[역사의 창] '영광의 민족사'에 대한 시대착오적 집착

# 최근 정부예산 45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 역사지도가 폐기됐다. 중국 일본 등 주변 국가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이 8년간 공들여 만든 지도다. 표면적 폐기 이유는 지도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도에 표시된 한사군(漢四郡)의 위치 등이 식민사관을 따르고 있다는 재야 사학계의 문제 제기에 일부 국회의원들이 동조함으로써 야기된 일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BC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이는 일본 학자들뿐 아니라 해방 후 평양에서 발굴된 유물과 국내 역사학계의 축적된 연구 성과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재야 사학계는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땅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조선 또한 통설과 달리 중국 베이징 동쪽부터 내몽고 남쪽 요서 지역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고대 제국이었다고 역설한다. 이런 주장에 밀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한 통설이 하루아침에 휴지가 된 것이다. # 역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떤 나라든지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고 감추고 싶은 역사가 있다. 한반도 역사도 그랬다. 하지만 우린 알게 모르게 자조적인 역사관에 길들여져 있었다. 스스로를 낮춰 보고 민족의 잠재력을 부정했다. 일제의 뿌리 깊은 잔재이자 악영향이었다. 지난 해 출간된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 7장면(이종호 저)'은 그런 부정적 의식을 털어내고 이왕이면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부터 먼저 알자는 취지로 쓴 책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를 무조건 찬양미화 하자는 쪽은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 아쉬운 역사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역사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과오에 대한 건설적 비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요즘이다. 여기엔 '찬란한 민족사' 복원에 힘쓰고 있는 재야사학의 '애국 마케팅' 역할이 컸다. 비등한 반대 여론을 묵살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관철시킨 박근혜 정부도 역설적으로 '바른 역사'에 대한 관심을 크게 환기시켰다. 하지만 나는 찬양 고무 일색의 민족사가 때론 불편하다. 광활한 만주 벌판 너머 멀리 시베리아, 중국 본토까지 우리 선조들의 무대였다는 상상은 물론 신나고 가슴 벅차다. 하지만 역사는 카타르시스를 위한 속풀이 대상이 아니다. 민족과 애국을 앞세우기 전에 실증은 적고 주장만 많은 사이비 역사라는 비판에 재야사학은 먼저 아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야사학이 역사 전공자 중심의 강단사학을 깡그리 식민사학이라 매도하는 것도 답답하다. 일제 총독부 조선사 편수관이었던 이병도 전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후예들이 지금까지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여전히 식민사학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재야사학의 오랜 주장이다. 하지만 이 또한 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사학 극복을 화두로 70년 이상 축적해 온 연구 성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식의 소치'라는 것이 강단사학의 반박이다. 이에 대해 재야사학은 자신있게 '아니오'라며 대응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역사를 보는 창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 자료나 검증된 연구방법론이 아닌 애국(사실은 애국도 아니지만)의 잣대에만 의존해 '영광의 민족사'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시대착오적이다. 지금 강행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밀실 집필이 우려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넓은 영토가, 강대한 군사력이 민족사의 영광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진정 역사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지금 우리의 바른 처신일 것이다.

2016-07-14

[역사의 창] 착한 사람, 착한 척 하는 사람

# 본성은 어느 정도 타고난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줄곧 착하거나 끝없이 나쁜 사람은 없다.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착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무시무시한 '조폭'도 제 아내에겐 한없이 좋은 남편일 수 있고, 밖에선 호인군자로 두루 칭찬받는 사람도 가정에선 무능한 가장으로 손가락질 받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천성적으로 착하다는 소리 듣는 사람이 있다. 손해 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돈 들여 시간 들여 남 좋은 일만 계속 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반대로 뼛속까지 악한(惡漢)이라는 소리 듣는 이도 가끔 있다. 아무리 교육하고 비판하고 처벌까지 받아도 끝내 남 해코지하는 습성 못 버리는 사람이 그렇다. 도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럴까. 최근 영국 엑세터대학 연구팀이 그 답을 찾아냈다. 지난 주 영국신문 데일리메일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유전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은 자기 개인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더 생각하도록 DNA가 설계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 인간의 본성 탐구는 고대 철학자들에게도 중요한 과제였던 모양이다. 2500여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맹자와 순자가 대표적이다. 맹자는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나지만 거짓과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점 악에 물들어 간다고 보았다. 이게 성선설(性善說)이다. 반대로 순자는 인간은 워낙 악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법과 도덕, 윤리와 규율로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악설(性惡說)이다. 둘 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상충된 두 주장이 칼로 무 자르듯 산뜻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누구든지 마음 속엔 상반되고 모순되는 두 감정이 늘 교차, 대립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성화(聖化)의 삶의 롤모델로 인정받는 사도 바울조차도 자기 안에 두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서 7:21)." # 우리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칭찬도 하고 본받으려고도 한다. 하지만 정말 착한 사람과 겉으로 착해 보이는 사람을 분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악한가 하는 명확한 기준을 새길 필요가 있다. 선함과 악함은 무엇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내 자존심이 소중하면 타인의 자존심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다는 것을 아는 것, 남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가능한 한 행하지 않는 것이 착함의 기본이다. 나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정의의 편에 서서 부조리에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선한 사람이다. 악함은 그 반대다. 세상이 아무리 지옥 같아져도 나만 잘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진짜 악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이야 괴로워하든 말든 날만 새면 이권다툼, 권력다툼으로 끊임없이 짜증 바이러스를 생산해내는 한국 정치인들은 악하다. EU 탈퇴를 부추겼다가 막상 통과가 되고 후폭풍이 몰아치자 언제 그런 소리했느냐며 오리발을 내미는 영국 정치인들도 같은 부류다. 한인사회도 그렇다. 이민자, 유학생, 노인, 불체자 등 미국 생활의 약자들만 골라 등치고 사기 치는 사람은 무조건 악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은 잘 없다. 있어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악한 사람은 갈수록 늘어난다. 이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아도 착한 사람이라는데. 과연 나는 어느 쪽일까, 한 번 더 나를 돌아보는 아침이다.

2016-06-30

[역사의 창] 안 되면 조상 탓, 잘 되면 내 탓

# 우리 조상들은 산이나 땅 모양, 물의 흐름 등 거하는 자연 공간의 위치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도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다. 각 왕조의 도읍지 선정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의 묘지나 집터까지 유달리 명당을 따졌던 것이 그 증거다. 이름하여 풍수지리 사상이다. 풍수지리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조선 개국 직후의 천도(遷都) 논쟁이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후 가장 먼저 도읍지 옮기는 것부터 생각했다. 고려 수도였던 개성은 땅기운이 쇠하여 더 이상 도읍지로 적합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새 도읍지로 처음 거론된 곳은 당대 최고 풍수가로 꼽히던 권중화가 추천한 계룡산 일대였다. 그러나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의 심복이었던 하륜의 반대에 부딪쳐 곧바로 취소됐다. 대신 하륜은 지금의 연희동, 신촌 일대인 무악을 천거했다. 하지만 최종 도읍지는 결국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밀었던 한양(현 경복궁 일대)으로 낙점이 됐다. 천도 작업의 주인공은 사실상 조선 건국의 기획·연출자였던 정도전이었다. 경복궁의 주요 전각을 비롯해 서울 사대문 이름을 모두 그가 지었다. 하지만 종묘·사직·궁궐·도로 등 수도 한양의 기본적인 공간 배치는 권중화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풍수전문가 김두규 우석대 교수의 주장이다(2016년 해냄출판사 발행 '국운풍수'). 관악산 화기(火氣)를 피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의 길을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비틀어 만든 것,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놓은 것 등이 모두 권중화의 풍수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조선은 철저히 풍수 사상에 입각해 도읍을 정했고 궁궐을 지었다. 훗날의 왕실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살피고 고른 땅이었지만 조선 500년 내내 왕실에 우환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을 보면 풍수사상 자체가 그렇게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면 정말 명당을 고르지 못했거나. (하륜은 적장자 상속 질서가 자리 잡기 힘든 터라는 이유로 한양을 반대했다. 훗날 조선 왕 27명 중 정실 왕비의 큰아들이 보위에 오른 경우는 8명뿐이었고 그것도 문종·단종·연산군·인종·경종 등 일찍 죽거나 전쟁, 폐위 등의 수난을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륜의 풍수가 한 수 위였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 최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서울 우이동에 있던 선친 묘를 선친의 고향인 경남 함양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북한산 개발로 우이동 묘소가 명당의 조건을 잃었다는 것이 이유다. 새로 옮긴 곳은 "다섯 개의 안산이 앞에 있고 뒤로는 지리산이 기운을 모아주는 길지"라고 한다. 또 명당에서만 나온다는 오색토가 출토됐다며 '큰 인물'의 출현을 기대한다는 이야기도 현지에선 나돌고 있다고 기사는 전한다. 하긴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7년 대선 2년 전 전남 신안군에 있던 부모 묘소를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었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연거푸 낙선한 후 조상 묘 일부를 전북 순창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왕이면 좋은 터에 조상을 모시고 싶은 마음, 이해는 한다. 후손된 입장에서 조상의 음덕을 조금이라도 입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과학문명 시대에 정치인들까지 '큰 인물' 운운하며 풍수에 매달린다는 것은 왠지 구차해 보인다. 사람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풍수보다는 타고난 명(命)과 운(運)에 달렸고, 그런 운명까지도 바꾸는 것이 적덕공부(積德工夫, 베풀어 덕을 쌓고 마음을 열어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도전도 나라가 잘 되고 못 되고는 사람에게 달렸지 지리의 성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치인이든 누구든 불확실한 풍수나 애꿎은 조상 탓 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함부터 살피는 것이 더 먼저일 것 같다.

2016-06-16

[역사의 창] '훔친 말씀'은 생명이 없다

# 조선시대는 글이 곧 시(詩)요 시는 곧 입신양명의 통로였다. 시는 또한 사대부 사회의 지적 풍류이자 더불어 어울리기 위한 오락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글 잘 쓰고 시 잘 짓는 것은 모든 사대부들의 꿈이었다. 그만큼 부담도 커서 선비들은 끊임없이 표절의 유혹과 싸워야 했다. 강원대 김풍기 교수는 '한시의 품격'이란 책에서 조선 선비들의 표절도 요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얼굴 화장을 하듯 기존 글을 덧칠하는 장점(粧點) 기존 작품의 생각과 표현법을 차용해 새 작품을 만드는 환골탈태법 선인의 시문을 도용한 뒤 글자만 슬쩍 바꿔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놓는 도습(蹈襲) 등은 창작과 표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던 조선 선비들의 흔한 글쓰기 수법이었다. 노골적으로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내놓은 경우도 있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1550~1608)이 대표적이다(그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때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다). 유영경은 중국 사신들로부터 동방 최고의 문장가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의 시는 모두 최립이라는 당대 최고 문장가의 대작(代作)이었다는 것이다. 최립(1539~1612)은 명나라에 수차례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 문장가들과 교류했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대필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쓰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좋은 글에 대한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욕망과 능력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다 결국 표절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고금동서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표절은 도둑질로 취급됐고 용서받기 힘든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었다. 요즘은 저작권 개념까지 더해져 법적 문제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표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표절에 대해 너무 둔감해졌고 처벌 또한 솜방망이에 머물러 있다는데 있다. 유명 작가나 연예인 정치인 대학교수 등 표절로 곤욕을 치렀던 사람들이 한바탕 여론의 폭풍우만 지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버젓이 활동을 재개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최근엔 한 기독교 인터넷 매체가 보도한 LA 유명 교회 담임목사의 표절 설교가 한인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목사는 당시 너무 바쁘고 심신이 피곤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래도 결론 부분은 다르다는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고 하는데 글쎄다. 그렇게 치면 핑계 없는 잘못이 어디에 있을까. 배 고프고 돈 없으면 도둑질을 해도 상관없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가 끊임없이 표절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양심 문제를 넘어 공동체를 지켜가는 기본 원칙을 무너뜨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표절이 일상화된 사람은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불의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도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이 되고 있다. 단 한 번 일지언정 많은 이들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 지도자의 표절을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늘 기도한다. 그렇다면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아니 그러려는 노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훔친' 말씀이라면 생명이 없다. 불의를 묵인하고 방관하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정의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종교는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불의한 자까지 보듬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어떤 종교에도 없다.

2016-06-02

[역사의 창] 미국은 일본에 속고 있다

1853년 미 해군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지금의 도쿄항인 에도만(灣)에 입항,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다. 당시 거대한 '흑선((黑船)'과 근대적 신무기 앞에 일본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결국 일본은 이듬해인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었다. 일본 근대사의 시작이자 서구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후 미일 양국은 전략적 파트너로 한 세기 이상 밀월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두 나라의 밀월은 우리에겐 때론 악몽이었다. 1905년 러일 전쟁 직후 미국과 일본이 비밀리에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대표적인 예다. 주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면 미국도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하겠다는 것. 이는 훗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미국의 일본 챙기기는 2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계속됐다. 미국은 일제 공산품을 최대한 수입해 줌으로써 일본의 산업화를 촉진시켰고, 석유와 고철 등을 공급해 군수산업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일본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침공함으로써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 동남아 등을 유린하며 인류 역사상 최대 최고 최악의 만행을 자행했던 바로 그 태평양 전쟁이다. 전쟁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두 곳의 원폭 투하로 끝이 났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무조건 항복했지만 미국은 또 다시 일본을 보듬었다. 군국주의 상징이던 천황제를 그대로 존속시켜 일본의 국체를 보존해 줬고 민주주의도 이식했다. 한반도에 6·25가 발발했을 땐 일본을 병참기지로 삼아 경제 재건의 발판까지 만들어 주었다. 세계 어떤 나라도 자신을 침공했던 전쟁 상대국에 대해 그런 관용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저변엔 중국이나 러시아 견제라는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이 깔려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미국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일본은 언제나 속마음(혼네)과 바깥 표정(다테마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 국무부가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 통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집필 의뢰했던 베네딕트 여사의 '국화와 칼'에서도 누차 경고하고 있는 바다. 실제로 틈만 보이면 언제든지 돌변하는 두 얼굴의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미국도 이미 진주만 침공 때 뼈 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미국은 자꾸만 일본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잊어가는 것 같다. 오바마 대통령이 다음 주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다. 히로시마가 어떤 곳인가. 인류 최초의 원폭 투하 현장이자 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다. 그런 곳을 미국 대통령이 찾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백악관 역시 사과 방문이 아니라고 애써 부인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전국이 축제 분위기라는 것부터 께름칙하다. 현직 미국 대통령의 피폭 현장 방문 자체가 '사과의 염(念)'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원폭 투하 후 71년이 지났지만 여태 어떤 미국 대통령도 히로시마를 찾지 않았다. 민간인 원폭 피해라는 인류사적 비극의 현장이긴 하지만 자칫 '일본의 원죄'를 희석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반성을 모르는 나라다. 이러다간 앞으로 일본이 미국에게 원폭 피해자 배상까지 요구하고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적반하장의 상황은 일본의 특기이고 우리도 위안부나 독도 문제 등 여러 방면에서 그것을 누차 경험하고 있다. 아무리 선한 뜻도 선한 상대일 때 통하는 법이다. 그러기엔 일본의 역사가 미덥지 못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지켜봐야 할 우리의 마음이 여러 가지로 착잡하다.

2016-05-20

[역사의 창] 노년 고독을 자초하는 사람들

날마다 카톡으로 좋은 글들이 들어온다. 부지런한 어르신 친구들로부터다. 최근 '절대 친구로 삼지 말아야 할 5무 인간'이란 글이 있어 간단히 소개한다. 5무 인간이란 무정, 무례, 무식, 무도, 무능한 사람을 말한다. 첫째, 무정한 사람은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다. 매력이 없다. 둘째, 무례한 사람은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다. 상종할 가치가 없다. 셋째, 무식한 사람은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다. 배울 게 없다. 넷째, 무도한 사람은 자기 본분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길, 아내의 길, 직장인의 길 등 마땅히 가야 할 바른 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산다. 다섯째, 무능한 사람은 게으르고 무사안일에 빠진 사람이다. 매사에 도움이라고는 안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글을 읽으며 반성해 봤다. 세상엔 그래도 이와는 거리가 먼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간혹 특이한 개성과 모난 성격으로 좋은 소리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다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렇다. A씨. 입만 열만 자기 자랑이다. 잘 나가던 시절 이야기, 자식 자랑 등으로 날이 샌다. 남의 말 들을 겨를이 없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만 돌아가는 줄 아는 전형적인 과대망상형이다. B씨. 불평불만을 달고 산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행동은 딴 판이다. 스스로에겐 더없이 관대하면서도 남에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인격자다. C씨.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혼자만 잘 난 줄 알아 시시콜콜 가르치려 든다. 나이가 벼슬인 양, 직위가 능력인 양 착각한다. 완장 찼다고 사람 달라졌다는 소리 듣는 기회주의자다. D씨. 지나치게 공짜 밝히고 자기 잇속 챙기는 데는 도사다. 남의 돈은 억만금도 아깝지 않고 자기 돈은 한 푼에 벌벌 떤다. 열 번을 얻어먹어도 밥 한 번 살 줄 모를 정도로 인색한 자린고비다. 고립과 왕따를 자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얼핏 봐서는 별로 부족한 것이 없다. 언변 좋고 실력도 갖췄다. 돈도 있다. 그럼에도 주변에 사람이 없다. 처음엔 환호하던 사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곁을 둔다. 겪어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만 정작 본인은 모른다. 인물보다 인품,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진정성 있는 행동이 인간관계에선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100세 시대라고들 한다. 하지만 장수가 축복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젠 누구나 안다. 질병, 빈곤 등 노년 행복을 위협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독도 그 중의 하나다. 2014년 시카고대학 심리학과 연구팀은 노년 고독이 조기 사망 위험을 14%나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고독은 수면장애, 고혈압을 유발할 뿐 아니라 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신체 면역체계에 악영향을 끼쳐 결국 사망 위험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노년 고독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위 4가지 유형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어서 빨리 바꿔나가야 한다. 카톡이나 블로그, 신문에서 매일 쏟아지는 노년 행복을 위한 좋은 글을 읽기만 할 게 아니라 한 두 가지라도 직접 따라 해 보는 것도 답이다. 논어 계씨편에는 사람의 4가지 등급이 나온다. 최상은 나면서부터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다. 그 다음은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또 그 다음은 어려움을 겪은 뒤에 아는 사람(困而學之)이다. 가장 낮은 등급은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困而不學)이다. 우린 누구나 생이지지자는 못 된다. 그렇다면 배워서라도 알아야 하고 그것도 아니면 경험을 통해서라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노년 고독이 그렇게 무섭다는데 말이다.

2016-05-05

[역사의 창] 지도자의 눈을 가리는 사람들

# 중국 한나라 때의 유학자 유향이 쓴 설원(說苑)이란 책이 있다.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온갖 지혜와 잠언이 담긴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거기에 육정(六正) 육사(六邪)라 해서 각각 여섯 종류의 바른 신하와 나쁜 신하 유형이 나온다. 먼저 나쁜 신하란 ①나라의 녹만 축내고 머릿수만 채우는 구신(具臣) ②앵무새처럼 지당한 말씀만 되풀이하는 아첨꾼 유신(諛臣) ③거짓 정보로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아 임금의 눈을 멀게 만드는 간신(奸臣) ④이간질과 중상모략만을 일삼는 모리배 참신(讒臣) ⑤자신의 부귀영달만 추구하고 여차하면 반역도 서슴지 않는 적신(賊臣) ⑥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지신(亡國之臣)이다. 다음은 바른 신하 여섯 유형이다. ①높은 인격을 갖추고 군주를 영광되게 만드는 성신(聖臣) ②어질고 자애로운 양신(良臣) ③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 놓는 충신(忠臣) ④지혜롭고 학덕 높은 지신(智臣) ⑤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정당하지 않은 재물은 결코 탐하지 않는 정신(貞臣) ⑥직언과 고언을 마다하지 않는 직신(直臣)이다. #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나쁜 신하와 바른 신하는 있다. 다만 군주가 영민하여 귀를 열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충신이 많았고, 거꾸로 귀가 얇고 용렬한 군주 밑에선 간신배들이 더 활개를 쳤을 따름이다. 우리 역사를 봐도 그랬다. 무열왕 김춘추를 도와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은 대표적인 성신(聖臣)으로 꼽힌다. 조선 초 명재상 황희는 양신(良臣)의 대명사다. 충신은 더 많다. 성충, 계백, 흥수는 백제의 3대 충신이다. 박제상과 죽죽은 신라 충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최영과 정몽주는 고려 충신으로, 사육신과 생육신 혹은 이순신 같은 이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충신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모두가 나라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던졌거나 임금의 잘못을 일깨웠거나 일편단심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다. 나쁜 신하도 있었다. 연산군 시대 유자광과 임사홍은 조선 최고의 간신으로 꼽힌다. 아첨과 이간질, 무고와 궤계로 임금의 눈을 가려 연산군을 조선 최악의 폭군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화(士禍)의 주역들이기도 하다. 망국지신으로는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을 들 수 있겠다. 요즘은 어떨까. 왕조시대도 아닌데 무슨 임금-신하 타령이냐고?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라면 국정을 살피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데 있어 그 정신이 다를 수 없다. 그럼에도 바른 신하는 드물고 지도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나쁜 신하들만 우후죽순 판을 치니 이렇게라도 걱정을 해 볼밖에. # 여당의 참패로 끝난 4·13 총선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향후 입지가 꽤 난처하게 됐다. 특유의 불통과 아집이 불러온 당연한 귀결일 터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민심을 읽어내지 못하도록 방조한 주변 당료들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변명은 구차하다. 여차하면 배신자로 몰리거나 자리에서 쫓겨나곤 한다는 핑계도 궁색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배에 물이 들어와 침몰 직전인데 딱 한 사람 듣기 좋으라고 알랑거리는 말만 일삼고 엉터리 정보만 늘어놓는 것이 공복(公僕)의 도리는 아니지 않는가. 지도자 하나 잘 못 세워지면 나라꼴 우습게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기업이나 단체, 하다못해 조그만 친목 모임조차 마찬가지다. 문제는 함량미달 리더는 때가 되면 바꿀 수 있지만 리더 곁에 독버섯처럼 기생하는 '나쁜 신하'들은 어떻게 막아볼 도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저 리더의 분별력을 기대하는 것 외에 양신·충신은 못돼도 유신·간신의 오명은 남기지 말아야지라는 말밖에 읊조릴 수 없는 세태가 안타깝다.

2016-04-21

[역사의 창] 여행기로 담아낸 낯선 세상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고 살았던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수렵 채취에서 농경생활로 접어든 이후니까 길게 잡아도 1만 년이 될까 말까다. 그 전 수십만 년, 수백만 년 동안은 먹을 것을 찾아 천지사방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 유랑 DNA가 고작 1만 년에 사라졌을 리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여행은 본능이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어디든 가보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욕망이다. 그렇지만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돈이 없어, 시간이 없어, 혹은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그것도 아니면 용기가 없어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 사람들에겐 먼저 가 본 사람들의 경험담이 그나마 위안이다(여행기의 묘미는 상상력 자극이다. 그런 점에서 눈으로 보여주는 영상 다큐보다는 책이 여행기로는 제격이다). 나에게 인류 여행기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성경을 꼽겠다. 성경이 여행기라고? 그렇다. 구약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및 정착 과정을 그린 아브라함의 여행기로 시작한다.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모세의 40년 광야 여정은 성경 여행기의 절정이다. 신약 성서 27권 중 13권을 차지하는 바울 서신 역시 지중해를 둘러싼 터키, 그리스, 로마 등지로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순 여행기는 아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기본 바탕이지만 그 속엔 사랑과 전쟁, 배신과 음모, 갈등과 화해, 그리고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인간사 모든 것이 녹아 있다. 성경이 특정 종교의 경전이면서도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이유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궁극적으로 역사를 바꾼 위대한 여행기는 성경 말고도 많이 있다. 세계 3대 여행기로 일컬어지는 7세기 중국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3세기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모로코 사람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가 대표적이다. 대당서역기는 손오공과 삼장법사로 유명한 소설 서유기의 모태가 된 책이다. 동방견문록은 유럽인에게 중국, 인도 등 동방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켜 지리상의 발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중세 이슬람 자료의 보고(寶庫)이자 아랍 여행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 역사에도 훌륭한 여행기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8세기 인도의 언어·풍속·지리·생활 모습 등에 관한 기록으로는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도 있다. 조선 500년 최고의 문장이라고까지 평가받는 이 책은 그 사유의 자유분방함으로 당시 지식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었다. '세계는 넓고 가 볼 곳은 많다'는 것을 처음 일깨워준 김찬삼의 세계 여행기, 젊은이들의 가슴에 배낭여행에 대한 꿈과 낭만의 불을 지핀 한비야의 오지 여행기, 그리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높이며 여행과 공부가 따로가 아님을 가르친 준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여행기라 하겠다. 최근 며칠 또 다른 여행기 읽는 재미에 푹 젖어 있다. 미주 시인 정찬열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500마일, 800km 순례자 길을 걸었던 이야기다. 저자는 31일 동안 낯선 땅을 밟아가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웅숭깊게 풀어놓았다. 꼼꼼한 정보와 공감어린 추억 이야기는 읽는 맛을 더하고, 지금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통찰은 책의 깊이를 더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불온하다. 꾹꾹 눌러 놓았던 내 안의 여행본능을 다시 꿈틀거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봄이라서 그런가. 여행기 한 권에 이렇게 마음이 일렁이다니. 주말, 어디라도 한 번 훌쩍 다녀와야 할까보다.

2016-04-07

[역사의 창]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조선시대에도 베스트셀러가 있었을까. 놀랍게도 조선시대엔 서점이란 게 없었다. 인쇄술이 발달했다지만 정작 책의 인쇄 출판은 국가가 독점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의미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널리 읽힌 책들은 있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던 만큼 사대부라면 사서오경을 읽고 또 읽어야 했다. 사서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한다.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다. 그밖에 동국통감, 자치통감 강목 같은 역사서도 선비들의 필독서였다. 어릴 때는 천자문부터 시작해 소학, 명심보감, 동몽선습, 격몽요결 같은 책을 차례로 공부해야 했다. 말하자면 이런 책들이 그나마 조선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는 어떤 책들일까? 마케팅 전문 사이트 스퀴두닷컴이 지난 50년간 가장 많이 팔린 책 톱10을 조사, 발표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1등은 역시 성경이다. 무려 39억 권이나 팔렸다. 2위는 마오쩌둥 어록. 8억2000만권이 팔렸다. 팔렸다기보다 10억 넘는 중국인들이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설들이다. 3위는 해리포터 시리즈(4억권), 4위 반지의 제왕(1억권), 5위 연금술사(6500만권), 6위가 다빈치코드(5700만권)다. 7위는 트와일라잇 사가(4300만권), 8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3300만권), 9위는 자기계발서인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3000만권), 그리고 마지막 10위는 안네의 일기(2700만권)였다. 모두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들이라는 광고 수식어가 붙는 책들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도 이런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있을까? 물론 있다. 올해로 발간 50년을 맞는 '수학의 정석'이 그 주인공이다. 저자는 서울대 수학과 출신의 홍성대. 족집게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1966년, 28세 때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발간 첫 해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수학 참고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4500만권이나 된다는 것. 나도 책을 몇 권 출간해 봐서 알지만 많은 저자들의 소박한 꿈은 초판이라도 다 팔려 재판을 찍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2000~3000부 찍는 초판이 다 팔리는 경우는 백에 서넛 될까 말까 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4500만부라니.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무색하지 않다. '정석'엔 비할 바는 아니지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수학 책이 또 있다. '수학 비타민' '수학 콘서트'라는 책이다. 저자는 홍익대 수학교육과 박경미 교수. 복잡하고 골치 아픈 수학을 이야기 식으로 재미있게 풀어내 인기를 끈 스타 교수다. 최근엔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1번을 배정받아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비례대표 1번은 그 정당의 성격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자리다. 그런 자리에 수학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저자를 발탁한 이유가 무엇일까. 알파고 바둑 열풍 덕에 두뇌 개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수학자를 전격 발탁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억지스럽다. 오히려 그보다는 수학보다 훨씬 어렵고 골치 아픈 대한민국 정치도 수학 문제 풀 듯 속 시원히 풀어주기를 기대해서라고 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박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첫 대학구조 개혁위원이었고 지금도 교육부 정책자문위원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에 입당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거기다 제자 논문 표절 의혹까지 받고 있다. 제1야당의 비례대표 1번의 향후 입지가 순탄치만은 않아 보이는 이유다. 수학자로서, 또 베스트셀러 저자로서 이런 불편한 문제들은 또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16-03-24

[역사의 창]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 조선시대 국왕은 모두 27명이었다. 모두가 저마다 극적인 이야기 소재를 갖고 있지만 알아갈수록 매력적인 왕은 역시 세종(1397~1450, 즉위 1418년)이다. 뛰어난 업적도 그렇거니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대할 때마다 '과연'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세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끊임없이 책을 읽었던 호학(好學)의 군주라는 점이다. 오죽하면 아버지 태종이 어릴 때부터 밤낮으로 책을 읽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책을 모두 치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또 하나는 실천의 군주였다는 점이다. 유교 경전과 역사, 천문, 음악, 의학 등을 두루 섭렵했지만 그저 읽어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조선의 현실에 적용하려 애썼다.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은 그런 지행일치(知行一致) 통치 철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진짜 매력은 딴 데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 냄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 명군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건강관리에 관한 한 우리 같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만과 당뇨에 시달리면서도 고기가 없으면 수라를 못들 정도로 육식을 절제하지 못했다. 눈 안 돌보고 책을 읽은 탓인지 평생 안질로 고생했으며 배뇨장애까지 앓았다. 그런 와중에도 왕비 후궁 등 부인은 6명이나 맞았고 18남 4녀라는 많은 자녀도 보았다. 지금 그런 다처다산(多妻多産)을 부러워 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들 열여덟은 조선 임금 중에서 최다 기록이다. '사람 냄새'의 절정은 한글이다. 1443년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된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 백성을 일깨우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연구 노력의 땀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 거기다 중화 사대주의에 물든 사대부들의 혹독한 반대까지 무릅써야 했다. 일국의 국왕이 뭐가 아쉬워 그렇게 사서 고생을 했을까. 세종이 직접 썼다는 훈민정음 서문에 그 답이 나온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할 말이 있어도 어려운 한자를 몰라 그 뜻을 드러내기 어려워하니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쉬운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들었으니…." 백성의 눈과 귀와 입은 어떻게든 틀어막고자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왕조 시대엔 훨씬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다. 늘 귀를 열어 두었고 백성의 언로를 틔워주려 했다. 백성에 대한 긍휼의 마음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런 게 진정한 '사람 냄새' 아닌가. #. 두달 전부터 오렌지카운티로 출근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많은 한인들을 만난다. 동포회관을 세우겠다며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6.25참전 기념탑을 건립하겠다며 뜻을 모아 뛰는 분들, 조국의 평화 통일 염원을 안고 봉사로, 기도로, 노래로 힘을 보태는 분들, 그리고 저마다 속한 단체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는 이들…. 어떻게 보면 모두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반문한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은 안 해도 되는 일을 일부러 해서 어려움을 자초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약은 사람은 절대 안한다. 아니 못한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은 인풋과 아웃풋의 수지타산을 잘 맞추지 못한다. 그저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좀 더 관심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그 바탕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는다. 세상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우리가 세계 어느 민족도 갖지 못한 위대한 문자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람 냄새 가득한 어진 임금의 '사서 고생' 덕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내일은 좀 더 밝아질 것이다.

2016-03-10

[역사의 창] 조기 퇴직자와 공자의 '인생삼락'

조선시대 형벌은 크게 5가지가 있었다. 사형, 유형, 도형(노동형), 장형(큰 매로 볼기치기), 태형(작은 매로 볼기치기)이 그것이다. 그중 양반 선비들이 가장 많이 받았던 형벌은 유형, 즉 산간 오지나 외딴섬으로의 귀양살이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존재의 이유도 발견한다. 유배는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의 차단을 의미했다. 그런 점에서 유배형의 가장 큰 고통은 고립과 단절감과 함께 다시는 세상 속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실의와 좌절감이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을 남긴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은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최고의 벼슬을 하다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유배지로 쫓겨온 비통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올 적에 빗은 머리 얼키언지 삼 년일세/ 연지분도 있네마는 눌 위하여 곱게 할꼬/ 마음에 맺힌 시름 첩첩이 쌓여 있어/ 짓나니 한숨이요 지나니 눈물이라.' 조기 퇴직, 조기 은퇴가 다반사가 된 요즘도 이와 비슷한 심경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회사를 떠나야 했던 한국의 친구도 그런 경우다. 지난 12월 총 2000명에 달하는 삼성그룹 임원 중 20%가 회사를 떠났는데 친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해 30년 가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직장이었다. 항상 남들보다 1시간 더 일찍 출근해 일했고 집보다 회사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40대 말에 직장인의 꽃이라는 임원까지 됐다. 하지만 '영예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이제 50대 초반. 적어도 몇 년은 더 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퇴직 통보를 받고 친구는 며칠을 울었다고 했다. 졸지에 '팽'당한 느낌이 한없이 서운하고 섭섭해서였다. 이런 이야기는 신문에나 나오는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가 그런 일을 겪는 것을 보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지난 주 썼던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이야기는 실은 그를 생각하며 쓴 칼럼이었다. 동시에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도 책과 글을 벗 삼아 오히려 더 빛나는 삶을 살아 낸 다산을 "나도 한때는…"이란 과거에 사로잡혀 조락해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모든 비슷한 연배에게 자기극복의 롤모델로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공자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천하의 공자도 50이 넘어서야 처음 벼슬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그 자리도 몇 년을 못 채우고 해임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공자는 자신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다. 말이 좋아 주유천하(周遊天下)였지 그야말로 조롱과 모욕의 시간들로 점철된 초라한 나그네 행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자리'를 얻지 못하고 68세가 되어 고향 노나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자는 더 큰 것을 찾았다.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터득한 것이다. 그것은 부귀도, 공명도, 명예도 아니었다. 논어 첫 장 첫 구절에 나오는 공자의 '인생삼락'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다음 세 가지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하거나 성내지 않으니 그 또한 군자가 아닌가.' 제 아무리 화려한 꽃도 열흘을 못 넘기고, 달도 차면 기울게 되어 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해서 크게 슬퍼할 것도, 너무 괴로워할 것도 아니다. 비록 유배지에서조차 주옥같은 저작들을 쏟아낸 송강처럼, 다산처럼 살지 못하는 '그저그런 인생'이라 해도 마음 먹기에 따라 공자의 인생삼락 정도야 얼마든지 누리며 살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옛벗이라도 만나 못하는 술이라도 한 잔 기울여야겠다.

2016-01-12

[역사의 창] 다산이 보낸 200년 전 새해 편지

조선시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답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이자 사상가, 정치가, 의사, 지리학자, 과학자로서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목민관의 자세를 밝힌 '목민심서', 각종 사회개혁의 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한 '흠흠신서', 의료서인 '마과회통' 등이 대표적인 저작이다. 뿐만 아니라 3000여 편 주옥같은 시와 절절한 편지는 지금도 민족문화의 자산으로 우뚝 솟아있다. 다산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게 만든 계기는 아무래도 그의 편지 모음집 출간이 아닌가 싶다. 다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석무 선생이 1979년 처음 펴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엔 18년 유배 기간 동안 다산이 두 아들과 둘째 형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와 당부의 말 등이 담겨있다. 자상한 아버지로서, 따뜻한 동생으로서, 엄격한 스승으로서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60여 편의 글이다. 2016년 벽두, 그의 편지를 다시 들춰보았다. 이미 여러 번 읽었음에도 다산의 목소리는 여전히 간곡했고 그 일깨움은 다시 새로웠다. 새해 아침, 다산에게 배운 몇 가지 가르침은 이렇다. 첫째, 계획하고 실천하는 삶이다. 마침 다산이 새해 첫날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글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해가 밝았구나. 군자는 새해를 맞으면서 반드시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새롭게 해야 한다. 나는 소시적 새해를 맞을 때마다 꼭 일 년 동안 공부할 과정을 미리 계획해 보았다. 예를 들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글을 뽑아 적어야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세워놓고 꼭 그렇게 실천했다." 언제부턴가 해가 바뀌어도 무심해지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에도 무감해졌다. 이 편지는 그런 나를 향해 보낸 편지 같았다. 다산의 꾸짖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야 되겠느냐, 정말 그래서야 되겠느냐." 둘째, 상황 탓하지 말고 남 핑계대지 말기다. 다산은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1801년, 순조 1년 때의 일이다.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선비에 게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할 겨를을 얻었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학문에 매진했다. 18년 긴 유배 생활 중에도 오직 글과 붓을 벗 삼아 그 많은 저작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조금만 처지가 나빠져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우리다. 아무리 상황이 열악하다 한들 유배지의 다산보다 더할까. 이 좋은 형편, 이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떻게 하면 될까 궁리하기보다 그저 안 된다는 핑곗거리만 찾고 있는 마음 자세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셋째, 생각을 바르게 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썼다. "폐족의 자제로서 학문마저 게을리한다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되지 못하겠느냐." 이 비장하고 처절한 당부 속에 서린 아버지의 피눈물을 두 아들은 과연 얼마나 알았을까. 이에 더해 왜 글을 읽어야 하는 지를 일깨우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어떤 자세로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모름지기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라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새해다. 또 한 해 그저 무심히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럴 때 200여년 세월을 뛰어 넘어 큰 선비의 가르침으로 한 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복이자 기쁨이다.

2016-01-04

[역사의 창] 5000년 한국사 '10대 뉴스'

세밑, 언론들이 바쁘다. 저마다 국내외 10대 뉴스를 선정해 가며 한 해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있다. 이참에 조국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의미로 5000년 한국사 10대 뉴스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다. 민족정기와 백성들의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10가지를 뽑아봤다. 첫째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다. 4세기 후반이다. 이전의 한반도는 자연숭배의 원시 종교였다. 그런 상태에서 불교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다 주었고 고대 국가의 성립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이후 불교는 민족문화의 기본 바탕이 됐다. 둘째는 신라 삼국통일이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당나라 군대까지 축출함으로써 676년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고구려 땅 만주를 잃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민족 정신의 뿌리가 됐다는 점 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어떤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 이후 오랜 분열과 전쟁의 종식으로 백성들이 처음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신라 통일의 큰 성과다. 셋째 과거제도 도입이다. 958년 고려 광종 때의 일이다. 중국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처음 실시된 후 조선 후기까지 계속됐다. 과거제도는 못 살고 못 배워도 열심히만 공부하면 누구나 정승 판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 교육만은 시킨다는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은 거슬러 올라가면 여기까지 그 뿌리가 닿는다. 넷째 고려 팔만대장경 조성이다. 고려 후기는 대몽 항쟁의 시기였다. 12세기 세계를 정복한 몽골은 고려에도 7차례나 침입했다.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가며 결사 항전했다. 팔만대장경은 그런 저항정신의 결정판이며 이후 98년간 몽골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족 자주성을 잃지 않았던 배경이 됐다. 다섯째 조선 건국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으로 고려 말 사회적 모순과 질곡이 일거에 타파됐다. 양인이 늘어나고 백성들의 지위가 안정되어 갔으며 유교가 정치 사회는 물론 일상생활의 규범이 됐다. 여섯째 한글 창제다. 1443년에 창제되고 3년 뒤 반포된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자를 가져야겠다는 자주정신과 모든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애민정신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일곱째 임진왜란이다. 1592년부터 7년간 이어진 일본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고 최대 10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여덟 번째 조선 후기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부흥이다. 이땅의 백성들은 기독교를 통해 개인의 존엄과 평등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떴다. 기독교는 또한 지금과 달리 민족 독립, 민주화, 통일 등의 시대 정신을 일깨우며 한국 사회를 이끌었다. 비판 받는 현대 기독교가 통곡하며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홉 번째 1910년 한일합방이다. 이후 35년 일본의 악랄한 통치가 남긴 상처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과 일상에 깊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기간을 통해 민족 자주독립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은 대대손손 곱씹어야 할 와신상담의 교훈이다. 열 번째 남북 분단과 6.25 한국전쟁이다. 동족끼리 총구를 겨눈 전쟁으로 수백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신생 독립 한국은 세계 최빈국으로 떨어졌다. 이는 역설적으로 통일 없이는 진정한 민족 번영도 없다는 당위성을 일깨웠다. 2015년이 저물고 있다. 역사는 올해를 과연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우리 가족은, 나는 또 무엇으로 2015년을 기억할 것인가. 이틀 남은 송년의 밤, 이런저런 10대 뉴스를 뽑아 보며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2015-12-28

[역사의 창] 고운님 기다리는 동짓달 기나긴 밤

#. 오늘은 동지(冬至)다.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다. 요즘처럼 전깃불도 없었으니 오죽이나 어둠이 길고 깊었을까. 16세기 조선의 유명 기생 황진이는 그 긴 밤에 빗대 어 그리운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사무치는 심정을 읊었다. 일찍이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 선생이 조선의 시 전부를 버릴지라도 황진이의 이 시 한 수와는 바꿀 수 없다고 극찬한 바로 그 시조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은 이날부터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뜻. 해서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새롭게 생명력이 충만해지고 광명이 부활하는 날이라 여겨 '작은 설'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날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터. 액운을 쫓는다는 의미로 팥죽을 쑤어 먹었던 것 말고도 서로 간에 진 빚을 청산한다거나 이웃간에 쌓인 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기회로 동지를 이용했다. 또 궁을 비롯한 관청에선 동짓날 아침 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동지하례가 행해졌고,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 해서 웃어른께 새로 지은 버선을 선물로 드리며 무탈한 겨울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말에 작은 선물을 나누는 것이나 불우이웃 돕기 혹은 지난 한 해 쌓인 앙금을 씻어내는 자리들을 애써 마련하는 것은 이런 전통에 뿌리가 닿아있다 하겠다. 단순히 크리스마스 선물 나누기 같은 서양 풍속이나 좋지 않았던 지난 일은 모두 잊고 가자며 흥청망청 마시고 노는 일본식의 '망년회' 영향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 지금까지 이어지는 동지 풍속 하나 더. 곧 달력 나누기다. 조선시대엔 천문, 풍수, 지리, 택일 등을 맡아보던 관상감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기상청이라 할 수 있지만 관장하는 일은 훨씬 넓고 다양했다. 왕궁이나 왕릉 등의 명당을 찾거나 집터 잡는 일, 길흉화복을 점쳐 임금의 합궁일이나 궁중 대소사의 길일을 잡는 일 등이 그것이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각과 날씨 변화, 24절기, 일식.월식 등을 꼼꼼히 기록해 달력을 만드는 일도 관상감의 중요한 업무였다. 그렇게 만든 달력을 책력(冊曆)이라 했다. 책력엔 지금의 달력과 달리 날짜의 흐름만 죽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24절기에 맞춰 농경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담았다. 그 책력에 어새(임금의 도장)를 찍어 동짓날 관아에 배포했고 관원들은 또 이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여름 앞둔 단옷날엔 부채를, 새해 앞둔 동지엔 달력을 선물로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 한국의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가 선정됐다고 한다. '혼용'은 어리석고 용렬한 군주를 가리키고 '무도'는 정상적인 궤도가 붕괴된 야만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혼용무도란 어리석고 무능한 지도자 때문에 나라꼴이 말이 아님을 꼬집어 지적한 사자성어가 되겠다. 물론 이 말이 가당치 않다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하랴.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대다수 교수님들이 보는 한국의 현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하긴 지난 한 해 그 많은 조언.직언.간언 다 외면하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자기 길만 고집스럽게 걸어갔던 우리 대통령을 생각하면 전혀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어려울 듯 싶다. 거기다 전세대란.취업대란.결혼대란, 입시지옥.교통지옥.분단지옥 등 온갖 '대란'과 '지옥' 타령에 '헬 조선'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한국의 밤은 동짓달 밤 이상으로 길고 깊어 보인다. 그렇다고 황진이 처럼 그 긴 밤 허리를 뚝 잘라낼 수도 없으니…. 그저 혼미하고 용렬한 어둠의 시간이 빨리 가고 어서 광명의 새벽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더 가까이 있는 법이니까.

2015-12-21

[역사의 창] 정말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망했을까

#.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혁신'을 내걸고 들어간 당이지만 끝내 아무런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탈당 발표 이후 온라인 댓글창이 뜨겁다. 차라리 잘됐다, 이참에 선명 야당 기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지만 야권 분열로 여당 좋은 일만 시켰다며 야당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렇게 분열은 나쁜 것이라 여기는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 스며있는 역사적 명제가 하나 있다.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다. 한국인은 단합할 줄 모르고 다툼과 분열이 민족성인 것처럼 주입시켜 저항의지를 꺾고자 일본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그릇된 논리다. 그럼에도 한번 심어진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가 당쟁이나 분열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도 이것이다. #. 요즘 한국사 책엔 당쟁이나 당파싸움이라는 말보다는 '붕당정치'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당쟁이나 당파싸움이 풍기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붕당(朋黨)은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정치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다. 붕당의 출발은 학문이나 사상적 유대였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같이 했다는 점에서 요즘의 정당과도 일맥상통한다. 붕당의 발생 배경을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전쟁 없이 비교적 평화적으로 출범한 나라였다. 그럼에도 건국 초기 피의 숙청은 피할 수 없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열 때도 그랬고, 그 아들 이방원이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보위에 오를 때도 그랬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에 힘을 보탠 공신들은 부와 권력을 장악하며 훈구파가 됐다. 반면 밀려난 이들은 조용히 낙향해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사림파다. 지방에서 힘을 키운 사림파는 9대 성종 때부터 서서히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훈구파를 밀어내고 조정을 장악했다. 동시에 사림파의 분열도 시작됐다. 선조 때 맨 먼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졌다. 조선 중기 이후 돌아가며 권력을 잡았던 이들 네 개의 붕당을 사색당파(四色黨派)라 한다. 우리는 사색당파의 폐해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사화(士禍)라는 보복정치로 상대 당파의 씨를 말렸고, 백성이 굶주리든말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찾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또한 일제 사학자들의 주장이지만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면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다. 무엇보다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독주를 견제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소수의 의견도 국정에 반영되는 기회가 됐다는 점도 있다.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현종-숙종-영조-정조 때가 상대적으로 민생이 안정됐을 뿐 아니라 조선 제2의 문화부흥기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붕당정치가 무너지고 안동김씨 등 특정 가문이 조정을 좌지우지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 조선의 국운이 기울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면은 더 분명해진다. #. 다시 안철수 탈당으로 돌아가자. 정치인이 이론이나 노선이 다르다면 갈라서는 것이 당연하다. 화합과 일치가 좋다지만 부부도 아닌데 참고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분열과 대립이 전혀 없는 상태는 과거 전제군주 시대, 혹은 일당독재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안 의원의 탈당은 야권 분열이라는 냉소적 시각보다는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의사를 담아 낼 수 있는 새로운 정파의 태동이라는 기대로 바라보고 싶다. 그의 탈당이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 정실주의로 변질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15-12-14

[역사의 창] 천재들의 글쓰기

#. 조선왕조 500년 최고의 천재라면 단연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다. 신사임당의 아들로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를 두루 역임했던 조선 최고의 학자다. 그의 천재성은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9번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증명이 된다. 율곡은 겨우 3살 때 석류가 벌어진 것을 보고는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라는 시를 지었다. '석류 껍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이 점점이 박혀있네'라는 뜻이다. 보통 아이들이 겨우 말을 배울 시기에 율곡은 이렇게 이미 자기 생각을 시로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율곡이 한 수 접고 들어간 천재가 있다. '나의 전생은 그였다'고 했을 정도로 깜빡 넘어간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최초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의 저자이기도 한 김시습이 3살 때 다듬이질 하는 어머니를 보며 지었다는 시는 이렇다. '무우뇌성하처동(無雨雷聲何處動) 황운편편사방분(黃雲片片四方分). 비도 안 오는데 어디선가 천둥소리.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라는 뜻이다. 김시습은 5살에 이미 경서(經書)에 통달해 세종을 놀라게 했다.하지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보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출가해 평생을 방랑 승려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남긴 글로 사후에 더 유명해졌다. 훗날 선조는 그의 글을 묶어 '매월당집'을 출간토록 했다. 조정이 개인 문집을 내 준 것이다. 또 한참 뒤 정조는 또 벼슬까지 내려 그를 이조판서에 추증하기도 했다. 천재는 타고 난다.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하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타고난 천재성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진정한 천재다. 율곡은 어릴 때부터 모친 신사임당에게서 사서(四書)를 배우며 남다른 향학열을 드러냈다. 김시습 역시 옛 선현들을 모범삼아 끊임없이 글을 읽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글 좀 쓴다는 선비 치고 평소 글 읽기에 소홀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글쓰기가 재능이긴 하되 치열한 노력과 연습 없이는 결코 열매로 맺어질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글쓰기 천재들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 신문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난감해진다. 단순히 글을 '쓴다'는 것과 '잘 쓴다'는 것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글쓰기에 입문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겐 다음과 같이 모범답안을 내민다. 첫째, 일단 뭐든지 써 보시라. 맞춤법 좀 틀리면 어떤가. 표현 좀 어색하면 어떤가. 처음부터 멋진 시나 소설, 논문 작품 쓰자는 것 아니지 않는가. 내가 먼저 써 봐야 남의 글도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알아보는 눈이 생기고, 나도 그렇게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둘째,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제일 중요한 것이 요점 정리다.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 생각을 요약 정리하는 연습부터 해 보시라. 그래야 생각하는 힘도 생기고 더 잘 표현하는 요령도 개발된다. 셋째, 글이 좀 된다 싶으면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 글쓰기에 정답은 없지만 어법 맞춤법 등 지켜야할 규칙은 있다. 솔직히 요즘은 누구나 쉽게 등단하고 쉽게 작가 호칭을 얻다보니 이런 기본에 약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 명색이 내가 수필가인데, 작가인데, 책까지 냈는데 하며 공부 않고 앉아만 있다간 금세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 2주전 시작한 중앙일보 글쓰기 강좌가 다음 주까지 이어진다. 뒤늦게 글쓰기에 관심 가진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필명이 꽤 드러난 분들도 참석하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공부엔 나이가 없고 자존심도 필요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우리가 모두 율곡이나 매월당 같은 천재는 아니니까.

2015-11-30

[역사의 창] YS가 닮은 세 사람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선 딱 한 번 보았다. 1987년 부산 유세 현장, 100만 인파 속의 한 사람으로서였다. YS와 김대중(DJ) 두 야당 거물이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각자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때였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고생 마이 했다 아이가. 그만큼 했으면 영삼이가 한 번 해야제. 영삼이 만한 대통령감도 없는 기라." 돌아보면 부끄러운 지역주의였고 치기어린 감상주의였다. 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논점은 그게 아니다. 영남 사람들에게 YS는 누구에게나 '영삼이'로 불릴 만큼 만큼 편하고 만만하고 친구 같은 정치인이었다는 말이다. 호남 사람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칭했다는 것과는 달리. 이런 추억 말고도 개인적으론 YS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세 사람이 있다. 책 속 주인공이기도 하고 실제 역사 속 인물이기도 한 사람이다. 첫째는 삼국지 주인공 유비다. 고우영은 '만화 삼국지'에서 유비를 '쪼다'로 묘사했다. 언뜻 흉 같지만 사실은 흉이 아니다. 어리숙하고, 손해 보는 듯한 일만 골라 좇았고, 사리사욕 챙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 그러면서도 대의명분을 최고의 자산으로 삼았던 사람이 유비다. YS가 그랬다. 일견 무지하고, 무식하고, 어리석어 보였지만 대의명분에 관한 한 양보할 줄 몰랐다. 그에게 대의란 민주화였고 군정종식이었으며 문민정부의 실현이었다. 남긴 재산이라곤 상도동 집 한 채뿐이라는 보도를 보면서 천문학적 재산을 챙겼던 모모 대통령들이 떠올라 어렵게 나라를 꾸렸던 유비가 더 생각이 난다. 유비는 용맹도 지략도 부족했다. 하지만 인재를 품고 키우는 데는 그만한 이가 없었다. 관우, 장비, 제갈량, 조자룡이 유비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YS도 그랬다.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그의 말 그대로 YS는 전문가와 재목을 알아봤다. 그래서 YS 옆에는 늘 최고의 인재들이 몰렸다. 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이인제, 손학규, 이재오, 김무성, 김문수 등 이후 한국 정치의 많은 주역들 역시 YS가 발탁한 사람들이다.(그들이 지금 한국 정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두 번째는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鄧小平)이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으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의미다. YS에겐 '3당합당'이 곧 흑묘백묘론이었다. YS는 유신 및 신군부 그리고 친일 세력과의 야합이라는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3당합당으로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 당시 논리가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공산 중국의 굴기와 급성장이 자본주의와 손잡은 흑묘백묘론의 열매인 것처럼, YS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은 YS식 '배신의 정치'가 일궈낸 역설이다. 끝으로, YS는 성경 속 인물 베드로도 연상시킨다. 그렇게 보면 평생의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바울과 비슷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반대로 바울은 치밀하고 주관이 뚜렷했으며 감옥에서도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써서 남겼을 정도로 지적이고 학구적이었다. YS와 DJ가 딱 그랬다. 한때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YS는 '3당 합당'이라는 배신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베드로와 바울이 목숨 걸고 매달렸던 것이 예수의 복음이었듯이 젊은 시절 YS와 DJ는 '민주화'라는 민족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 지금 온라인에선 두 얼굴의 YS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민주 투사로서의 YS가 그 하나요 IMF 국가부도를 부른 장본인으로서의 YS가 다른 하나다. 하지만 양쪽 모두 동의하는 것이 있다. 비록 YS가 허물이 많았다 하나 지금은 그만한 인물조차 없다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난쟁이 정치인들이 벌이는 '찌질한' 한국 정치에 대한 장탄식이자 안타까움인 것이다. 거산(巨山)이 떠나는 길, 한국 정치의 큰 산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어서 마음이 헛헛하다.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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